레진코믹스 주인은 매킨토시 들여오던 회사, 작년 미국서 웹툰값 250억원 받았다
레진코믹스 주인은 매킨토시 들여오던 회사, 작년 미국서 웹툰값 250억원 받았다
2013년 레진코믹스가 독자에게 내민 조건은 단순했다. 다음 편은 7일을 기다리면 공짜다. 지금 보고 싶으면 300원에서 500원을 낸다.
그때 네이버와 다음은 웹툰을 공짜로 풀고 있었다. 웹툰에 돈을 낸다는 생각 자체가 낯설던 때다. 그런데 독자들은 버튼을 눌렀다. 이듬해 레진엔터테인먼트의 매출은 약 103억원이었다.
레진이 판 것은 웹툰이 아니다. 기다리지 않을 권리다. 그 권리를 사는 지갑은 이제 미국에서도 열린다. 작년 레진의 미국 서비스에서 독자들이 결제한 돈이 250억원이다. 그리고 이 장사의 주인은 1987년 애플 매킨토시를 들여와 팔던 회사, 키다리스튜디오(020120)다. 남의 물건을 들여오던 수입상이 자기 물건을 내다 파는 수출상이 됐고, 레진이 그 수출의 몸통이다.
10월 8일 레진엔터테인먼트는 유상증자 결정을 두 건 공시했다. 새 주식을 찍어 돈을 받겠다는 결정이다. 2022년 1월 틱톡을 운영하는 바이트댄스에게서 240억원을 받은 데 이어 또 바깥 돈을 들인다. 독자의 결제는 해마다 쌓이는데 자본은 거듭 밖에서 채운다.
공짜 웹툰 옆에서 300원을 받았다
레진엔터테인먼트는 2012년 4월 세워졌다. 회사 이름은 2004년부터 이글루스에서 '레진닷컴'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던 블로거 레진, 한희성의 필명에서 왔다. 2013년 6월 안드로이드 앱이 먼저 나왔고 8월에 아이폰 앱, 9월에 웹사이트가 뒤따랐다.
유료화는 업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레진코믹스는 구글플레이 만화 부문과 앱스토어 도서 부문에서 매출 1위에 올랐고, 광고 한 줄 없이 2014년 매출 약 103억원을 냈다.
이 모델에서 돈을 내는 사람은 작품을 많이 보는 독자가 아니다. 다음 편을 못 기다리는 독자다. 그러니 레진의 매출은 작품 수보다 독자의 조급함에 달려 있다. 순위표가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 보면 이 장사의 성격이 드러난다. 레진 100위 안에 든 BL(남성 간 로맨스, 성인물 포함) 작품은 2014년 6편에서 2022년 50편으로 늘었다. 한 회 한 회 다음 장면이 궁금해 지갑을 여는 장르가 순위의 절반을 차지했다. 레진은 독자가 무엇에 기꺼이 돈을 내는지를 일찍 알아챘고, 그 답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애플을 팔던 회사가 웹툰을 샀다
레진의 주인 키다리스튜디오는 법인으로 따지면 1987년 7월생이다. 처음 이름은 엘렉스컴퓨터였다. 1988년부터 애플 매킨토시를 국내에 독점으로 들여와 팔았다. 독점이었으니 그 시절 한국에서 정식으로 팔린 매킨토시는 이 회사 유통망을 거쳤다.
1998년 애플이 애플컴퓨터코리아를 세웠다. 본사가 직접 들어오자 독점이 끝났다. 2000년 8월 엘렉스는 매킨토시 사업을 정리하고 시스템 통합과 솔루션을 하는 IT 회사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그 무렵 엘렉스는 키움증권을 비롯한 벤처 10여 곳에 돈을 넣어 둔 상태였고, 대주주 자리는 다우기술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키움증권은 그해 2월 다우기술이 세운 증권사다. 웹툰 회사의 족보가 키움증권과 같은 집안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여기다.
회사는 인큐브테크, 다우인큐브로 이름을 바꾸며 다우 계열 안에서 굴렀다. 2018년 1월 웹툰 플랫폼 봄툰을 운영하던 봄코믹스를 합병했고, 2월에 키다리스튜디오가 됐다. 3년 뒤인 2021년 2월 23일 레진과 주식의 포괄적 교환을 마쳤다. 레진 주주들이 레진 주식을 내놓고 키다리스튜디오 주식을 받는 방식이다. 현금 대신 자기 주식으로 레진을 통째로 샀다. 당시 레진은 카카오페이지·네이버웹툰 다음 3위 플랫폼이었고, 2019년 매출 345억원에 영업손실 52억원을 낸 회사였다.
이 회사의 역사에서 1998년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남의 물건을 파는 장사는 그 물건의 주인이 직접 들어오는 날 끝난다. 레진을 사면서 키다리스튜디오가 손에 넣은 것은 앱 하나가 아니다. 작품의 권리, 곧 누구도 회수해 갈 수 없는 자기 물건이다. 2022년 바이트댄스와 손잡을 때 회사가 내놓은 것도 약 1,300편의 웹툰 권리였다.
수입상이 수출상이 됐다
레진은 2015년 일본에, 그해 12월 미국에 서비스를 열었다. 국내에서 통한 '기다리지 않을 권리'를 그대로 들고 나갔다. 2022년 레진 매출 783억원 가운데 미국이 168억원, 일본이 94억원이었다. 미국 매출이 일본보다 80% 가까이 많았다.
2025년 레진의 매출은 1,104억원이다. 미국 서비스 '레진US'의 결제액은 250억원 규모였다. 결제액은 독자가 낸 돈의 합계라 회사 매출과 같은 숫자가 아니다. 같은 해 키다리스튜디오의 연결 매출은 2,175억원, 영업이익은 124억원, 순이익은 65억원으로 순손익이 흑자로 돌아섰다. 레진 한 회사의 매출이 그룹 연결 매출의 절반쯤 된다(내부 거래를 빼기 전 단순 비교). 대만 봄툰은 결제액 100억원을 넘겼고, 일본 '벨툰'은 누적 가입자 100만명을 모았다. 2026년 1분기 연결 매출은 583억원으로 1년 전보다 21% 늘었다.
1987년 이 회사는 미국에서 만든 컴퓨터를 한국에 들여와 팔았다. 2025년에는 한국에서 만든 웹툰을 미국 독자에게 판다. 물건이 오가는 방향이 정확히 뒤집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물건의 주인이 이 회사다. 레진은 작품을 다른 그릇에도 담기 시작했다. 숏드라마 플랫폼 '레진스낵'에서 인기작 '야화첩'을 짧은 드라마로 다시 만든다. 같은 권리를 한 번 더 파는 길이다.
결제는 쌓이는데 자본은 밖에서 들어온다
레진은 독자의 결제만으로 몸집을 키운 회사가 아니다. 2014년 4월 엔씨소프트가 50억원을 넣었고, 2016년에는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가 들어왔다. 2022년 1월에는 바이트댄스가 레진에 240억원, 모회사 키다리스튜디오에 240억원, 합쳐 480억원을 넣었다. 지금 바이트댄스는 키다리스튜디오 지분 3.72%를 쥔 주주이고, 엔씨소프트도 4.43%로 남아 있다(2024년 12월 기준).
모회사 장부에도 레진의 무게가 그대로 실려 있다. 2024년 말 키다리스튜디오의 영업권은 1,411억원으로 총자산의 42.7%였다. 영업권은 회사를 살 때 장부상 순자산보다 더 얹어 준 값이다. 레진을 비롯해 사들인 회사들의 앞날에 걸어 둔 돈이 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2023년에는 그중 146억원을 손상으로 털어 냈고, 그해 순손실이 356억원이었다.
그리고 10월 8일, 레진은 다시 새 주식으로 돈을 받기로 했다. 독자가 내는 돈은 해마다 늘었는데 회사의 자본은 여전히 바깥 돈으로 채운다. 이 회사의 급소는 여기다. 새 주식을 거듭 찍는다는 것은 결제로 들어오는 돈이 작품을 사고 새 시장을 여는 데 드는 돈을 아직 혼자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엘렉스 시절에는 본사가 마음을 바꾸면 끝나는 장사였다. 지금은 투자자가 지갑을 닫지 않는 한 버틸 수 있는 장사다. 둘은 다르다. 앞의 것은 남의 손에 달려 있었고, 뒤의 것은 쥐고 있는 작품 목록이 담보다.
1998년 엘렉스컴퓨터는 본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팔 물건을 잃었다. 같은 법인이 30년 가까이 지나 미국에 들고 가는 것은 상표를 빌린 물건이 아니라 권리를 제 손에 쥔 작품이다.
이 수입상이 배운 것은 하나다. 가게를 지키는 것은 간판이 아니라 물건의 주인 자리다.
관련 회사 이야기: 남의 나라 콘텐츠를 들여와 회사를 키운 또 다른 길은 대원미디어는 지브리 영화를 들여온 회사인데 매출 45%가 닌텐도다에서 다뤘다. 새 주식을 찍어 돈을 받는 구조는 유상증자 뜻에 정리돼 있다.
근거 자료: DART 공시 목록(레진엔터테인먼트 유상증자결정, 2026-10-08), 레진코믹스 설립·과금 방식·2014년 매출, 출시 당시 업계와 순위표 변화, 레진 연혁·2022년 지역별 매출, 레진 매각과 2019년 실적(2020-11-09), 키다리스튜디오 영업권·손상(2025-03-25), 키다리스튜디오 2025년 실적(2026-02-16), 2026년 1분기 실적·레진스낵(2026-05-13), 엘렉스컴퓨터에서 키다리스튜디오까지, 엘렉스컴퓨터 사업 전환(2000-08-01), 다우기술 연혁, 다우데이타 2025 사업보고서(레진 주식 교환 일자), 레진엔터테인먼트 2025년 매출.
이 글은 공개 자료에 근거한 사업 해석이며 투자 권유가 아니다. 수치는 본문에 적은 각 시점 기준이다. 레진US 결제액은 독자 결제 기준이라 회사 매출과 다르다. 10월 8일 유상증자의 금액·배정 대상 등 조건은 이후 공시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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